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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타고
신태인에서 정읍을 향해 걸을 때 쉬었던 88공원. 등나무 꽃이 이쁘게 핀 작은 공원에서 쉬고 있는데 아랫마을에서 전동휠체어를 타고 할머니 한 분이 올라오나 싶더니 뒤따라 올라오는 전동휠체어 탄 또 다른 할머니를 기다리신다. 말씀 들어보니 일주일에 세 번 공원을 청소하신다고. 덕분에 깨끗한 공원에서 잘 쉬었다 갑니다. 뼈대만 앙상해 보이는 나무가 궁금해 물어보니 백일홍이라고 알려주신다. 산과 다르게 걷기는 생각보다 발이 아파 휴식이 많이 많이 필요했다. 산은 체력 조절하며 올라가서 봉우리 찍고 내리막 때 쉬엄쉬엄 내려가면 휴식이 대충 되는데, 걷기는 아픈 발 때문에 쉬엄쉬엄 걸어가기를 할 수가 없고 온전히 멈춰 앉아야만 휴식이 되었다. 그리고 일정 초반에는 쉬고 일어서서 첫 발을 내딛으면 그 쉰 시간만큼의..
땅끝탑까지 완주한 여러 선지자의 글을 보면서 힘든가 보다...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어느 선지자 말대로 이건 제정신으로 할 게 아니었다. 완주한 모든 선지자는 진심으로 대단한 분임에 틀림이 없다. 먼저 단순하고 무료한 것까지는 감내하겠는데 발이 너무 아프다. 발과 물집이 물아일체가 된 이후로도 발은 계속 아프다. 숙소에 누워 잠을 청하는 사이에도 발은 계속 아프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다음날 아침에는 괜찮다는 것. 그래서 괜찮네~하며 그 고행을 또 하게 된다는 것. 선지자는 이 고통을 어떻게 이겨냈을까? 아래 논산시를 알리는 표지판을 여러 선지자의 후기에서 접했는데 운동 한 번 안 한 어린 선지자가 여길 걸어왔다는 자체가 솔직히 놀라웠다. 걸어보니 여기까지 거리가 공주로부터 꽤 멀었기 때문. 그렇다고 여기..
아르키메데스는 욕조에서 유레카를 외쳤지만 나는 욕조에서 회의감을 느꼈다. 논산에서 익산으로 진입할 때였다. 밥집 만복래에서 기분 한번 상하고, 미륵산 근처에서 더위에 또 한번 지치고, 익산시 들어가서 보행자 불편하게 만드는 직좌 동시신호 체계에 짜증나고. 얼마나 짜증이 났는지 나중엔 대로변을 포기하고 뒷길로 걸었다. 뒷길에서 쇠퇴해 가는 상가들을 보니 마음도 꿀꿀하고. 이런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반신욕 하다가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발에 물집 짜다가 또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위기는 겹쳐서 온다고 다음날 익산에서 김제를 지날 때였다. 주로 다음지도를 이용했는데 알려준 농로가 걷기 불편해 중간에 도로로 나서게 됐고 이후부터 계속 생각이 우왕좌왕하며 이 경로 저 경로 계속 바꾸니 다음지도마저 나..
애초에 별다른 의미를 부여한 걷기가 아니라서 해남 땅끝탑에 도착했을 때 기분은 내 발로 한반도에 선 하나 그었다는 아주 조금의 성취감과 원 없이 걸었다 정도. 잃은 것으로는 검지 발톱 두 개... 시즌1 때 찢어진 발바닥 피부에 신경 쓰느라 피멍 든 발톱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결국 잃었다. 발톱 빠진 게 처음이라 많이 아프고 걷지도 못할 줄 알았는데 전혀~ 지금은 많이 회복중. 참고로 걷는 내내 괴롭혔던 발바닥 물집은 장성부터는 물아일체가 되어 고통에서 해탈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래도 종이반창고는 매일 아침 열심히 붙였다. 그리고 남은 게 있다. 껌 종이로 쓰고 남은 수많은 영수증과 햇볕에 그을린? 타버린? 손과 귀.
대략 2주일이 넘는 일정이기에 빈틈없는 준비가 필요하다. 그리고 배낭 무게는 최대한 가볍게. 준비를 마치고 저울에 올려보니 약 5.5kg이었다. 당일치기용 28리터 배낭이라 용량이 애매해서 해결책으로 세탁망을 이용했다. 배낭에 매달면 보조 가방보다 훨씬 저렴하게 용량 확장이 가능하다. 특히 원래 용도에 맞게 덜 마른 빨래를 넣어두기 좋다. 또한 다양한 크기의 비닐 봉지도 챙기면 좋다. 그리고 구급약도 기본적으로 필요하다. 감기용 타이레놀 콜드, 배탈설사용 정로환, 상처용 후시딘, 근육통용 안티푸라민 로션, 소독용 과산화수소. 종이반창고, 일회용 반창고, 바늘, 실, 라이터. 여기에 압박붕대 및 다용도칼도 있으면 좋다. 라벤다는 사타구니 쓸리는 통증 때문에 찾아간 피부과에서 처방받은 연고. 더불어 기간이 ..
길하면 유명한 영화가 있다. 음악도 유명한 길이다. 아무튼... 17일동안 참으로 다양한 길을 걸었다. 인도에서 시작해서 유명한 1번 국도, 한적한 지방도, 논두렁 밭두렁, 자전거길, 여기에 산길까지. 이 길 모두 발이 적응하기까지 가시밭길과 다를 게 없었다. 길을 걸으며 미처 몰랐던 발에 소중함을 마음에 새긴다. 그리고 밤마다 발을 바라보고 만져준다. 너 덕분에 여기까지 왔다.
혼자서 이동하면 심심하기 마련. 흡연 시절이었다면 17일 동안 아주 맛나게 폈을텐데 금연한지 8년이 되니 담배 생각은 전혀 안 나고 다른 길동무가 필요했다. 단순하고 무료한 걷기 상황을 달래주기 위해 음악을 주로 들었다. 70,80년대 인기곡 위주로 모으니 대충 4시간반 정도 연주되는데 이걸 두 번 들으면 하루 걷기는 대충 끝. 그 중 아바 노래가 무료함을 많이 달래주었다. 그리고 어쩌다 마주치는 도로 반사경~ 그냥 사진 찍게 된다. 별것도 아닌데 신경 써가며... 마지막 반사경 사진을 찍고 무릎 보호대 분실. 쉬었던 자리로 다시 가봤으나 안녕~ 구입 후 처음엔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4년 간 써보니 쓸만했는데. 그리고 아침을 여는 시작과 함께 그림자놀이. 맑은 날씨와 시간이 잘 맞아야 가능한 놀이다. 스..
합계출산율 하락에 따른 인구 감소는 알고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몸에 와닿은 사건은 얼마 전 상계초등학교 졸업생이 49명이라는 지역 신문 기사를 접하고 나서다. 나 때에 비하면 1/10도 안 되는 수치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신입생은 더 적다... 그리고 이번에 해남 땅끝을 향해 걸으며 눈으로 직접 보게 됐다. 수많은 빈집과 폐가. 이는 깨진 유리창 효과처럼 또 빈집을 만들고. 특히 전라북도에서 많은 빈집을 보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누군가의 삶에 터전이었을 집들이 무너지는 광경을 목도한다는 것은 그리 좋은 경험은 아니었다. 시골엔 자기 몸 하나 추스르기 버거운 연로한 노인들이 대부분인데 그런 그들이 쓰러져 가는 집 담장, 지붕까지 신경 써가며 수선하기는 무리겠지. 더불어 신시가지가 들어서면 구시가지는 퇴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