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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타고
영산강 습지를 걷는 중 의자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엄청난 소음이 들리더니 내 머리 위로 뜬금없이 전투기가 바퀴를 내리고 빠른 속도로 지나가고 있다. 평택 못지 않은 소음이었다. 영산강변을 걷는 내내 계속된 전투기 이륙 소음을 듣고 있으니 짜증이 올라온다. 이 소음을 듣고 어떻게 살지? 광주 지역방송에서 본 군 공항 이전에 관한 뉴스가 절실히 와닿는 순간이었다. 개울에 빠져 죽어 있는 고라니. 도로에 누어 죽어 있는 고라니. 수풀에 걸려 죽어 있는 고라니. 이 소음 속에 한낮에 살아 있는 고라니와 마주치다니. 이른 아침 마을을 빠져나가는 중 우연히 마주친 똥개. 검정 비닐봉지를 물고 가다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얼음처럼 굳는다. 아마도 저 검정 비닐봉지를 계속 물고 가야하나? 마나?를 생각하는 것처럼. 무..
나는 산을 좋아하는 게 맞다. 530km 원 없이 걸어 땅끝탑에 도착한 것보다 중간에 3개의 산을 오른 게 더 즐거웠으니. 천태산은 지나가는 동혈고개 바로 옆이라 한 번만 짧게 치고 오르면 정상이라 수월했다. 갈재 바로 옆이라 방장산까지 더해 애초에 4개의 산을 오르려 했으나 산 위세에 위축되어 방장산은 통과했는데, 5월15일까지 입산금지 기간이라 오르지 않기를 잘한 듯. 네 발로 기어오른 월출산은 이번 여정에 백미다. 하루 날 잡고 월출산을 오른 것은 백번 잘한 일이었다. 달마산은 땅끝탑에서 역방향으로 남파랑길 따라 오르기엔 주력이 그 정도는 아니라서 시간에 쫓기며 황급히 정상만 찍고 내려와 아쉬움이 많다.
신태인에서 정읍을 향해 걸을 때 쉬었던 88공원. 등나무 꽃이 이쁘게 핀 작은 공원에서 쉬고 있는데 아랫마을에서 전동휠체어를 타고 할머니 한 분이 올라오나 싶더니 뒤따라 올라오는 전동휠체어 탄 또 다른 할머니를 기다리신다. 말씀 들어보니 일주일에 세 번 공원을 청소하신다고. 덕분에 깨끗한 공원에서 잘 쉬었다 갑니다. 뼈대만 앙상해 보이는 나무가 궁금해 물어보니 백일홍이라고 알려주신다. 산과 다르게 걷기는 생각보다 발이 아파 휴식이 많이 많이 필요했다. 산은 체력 조절하며 올라가서 봉우리 찍고 내리막 때 쉬엄쉬엄 내려가면 휴식이 대충 되는데, 걷기는 아픈 발 때문에 쉬엄쉬엄 걸어가기를 할 수가 없고 온전히 멈춰 앉아야만 휴식이 되었다. 그리고 일정 초반에는 쉬고 일어서서 첫 발을 내딛으면 그 쉰 시간만큼의..
땅끝탑까지 완주한 여러 선지자의 글을 보면서 힘든가 보다...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어느 선지자 말대로 이건 제정신으로 할 게 아니었다. 완주한 모든 선지자는 진심으로 대단한 분임에 틀림이 없다. 먼저 단순하고 무료한 것까지는 감내하겠는데 발이 너무 아프다. 발과 물집이 물아일체가 된 이후로도 발은 계속 아프다. 숙소에 누워 잠을 청하는 사이에도 발은 계속 아프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다음날 아침에는 괜찮다는 것. 그래서 괜찮네~하며 그 고행을 또 하게 된다는 것. 선지자는 이 고통을 어떻게 이겨냈을까? 아래 논산시를 알리는 표지판을 여러 선지자의 후기에서 접했는데 운동 한 번 안 한 어린 선지자가 여길 걸어왔다는 자체가 솔직히 놀라웠다. 걸어보니 여기까지 거리가 공주로부터 꽤 멀었기 때문. 그렇다고 여기..
아르키메데스는 욕조에서 유레카를 외쳤지만 나는 욕조에서 회의감을 느꼈다. 논산에서 익산으로 진입할 때였다. 밥집 만복래에서 기분 한번 상하고, 미륵산 근처에서 더위에 또 한번 지치고, 익산시 들어가서 보행자 불편하게 만드는 직좌 동시신호 체계에 짜증나고. 얼마나 짜증이 났는지 나중엔 대로변을 포기하고 뒷길로 걸었다. 뒷길에서 쇠퇴해 가는 상가들을 보니 마음도 꿀꿀하고. 이런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반신욕 하다가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발에 물집 짜다가 또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위기는 겹쳐서 온다고 다음날 익산에서 김제를 지날 때였다. 주로 다음지도를 이용했는데 알려준 농로가 걷기 불편해 중간에 도로로 나서게 됐고 이후부터 계속 생각이 우왕좌왕하며 이 경로 저 경로 계속 바꾸니 다음지도마저 나..
애초에 별다른 의미를 부여한 걷기가 아니라서 해남 땅끝탑에 도착했을 때 기분은 내 발로 한반도에 선 하나 그었다는 아주 조금의 성취감과 원 없이 걸었다 정도. 잃은 것으로는 검지 발톱 두 개... 시즌1 때 찢어진 발바닥 피부에 신경 쓰느라 피멍 든 발톱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결국 잃었다. 발톱 빠진 게 처음이라 많이 아프고 걷지도 못할 줄 알았는데 전혀~ 지금은 많이 회복중. 참고로 걷는 내내 괴롭혔던 발바닥 물집은 장성부터는 물아일체가 되어 고통에서 해탈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래도 종이반창고는 매일 아침 열심히 붙였다. 그리고 남은 게 있다. 껌 종이로 쓰고 남은 수많은 영수증과 햇볕에 그을린? 타버린? 손과 귀.
대략 2주일이 넘는 일정이기에 빈틈없는 준비가 필요하다. 그리고 배낭 무게는 최대한 가볍게. 준비를 마치고 저울에 올려보니 약 5.5kg이었다. 당일치기용 28리터 배낭이라 용량이 애매해서 해결책으로 세탁망을 이용했다. 배낭에 매달면 보조 가방보다 훨씬 저렴하게 용량 확장이 가능하다. 특히 원래 용도에 맞게 덜 마른 빨래를 넣어두기 좋다. 또한 다양한 크기의 비닐 봉지도 챙기면 좋다. 그리고 구급약도 기본적으로 필요하다. 감기용 타이레놀 콜드, 배탈설사용 정로환, 상처용 후시딘, 근육통용 안티푸라민 로션, 소독용 과산화수소. 종이반창고, 일회용 반창고, 바늘, 실, 라이터. 여기에 압박붕대 및 다용도칼도 있으면 좋다. 라벤다는 사타구니 쓸리는 통증 때문에 찾아간 피부과에서 처방받은 연고. 더불어 기간이 ..